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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레타 거윅의 ‘이성과 감성’, <작은 아씨들 Little Women (2019)>
    영화재현상 2022. 1. 11. 09:34

    이 글은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연합문집에 게재한 글입니다. 

     

    01 거윅의 이성, 여성 영화의 필요성을 증명하다.

      그레타 거윅이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은 아씨들을 각색하여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어쩐지 그레타 거윅이 그리는 로리와 베어 선생이 궁금해졌다. 물론 <작은 아씨들>은 당연히 자매들의 이야기가 영화의 핵으로 만들어질 것이고, 또 그리 만들어지는 것이 옳다. 내가 구태여 영화에서 그려질 로리와 베어 선생을 기대한 이유는 독자로써 작은 아씨들을 읽을 무렵 어린 내겐 로리와 베어 선생에 이입할 여지가 넘쳤기 때문이다. 잠시 유년기의 어느 시절로 돌아가 소년의 마음을 강타한 수많은 이름들을 생각해 보자. 방에서 책을 읽는 게 놀이터 흙장난보다 재밌던 소년의 눈엔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여정은 과히 무모했다. 세드릭 에롤과 올리버 트위스트의 인생 역전은 내 인생에서 벌어질 리 만무했다. 좀 더 자랐을 때도 미국의 피터 파커와 달리 나는 전 과목을 통틀어 과학에 가장 젬병이었다. 영국의 호그와트 입학처는 대한민국 동래정씨 동평군파 30대손에게 입학 예비번호도 주지 않았을 거다. 어느덧 청소년이 되자 미국의 토니 스타크와 영국의 브루스 웨인이 여름마다 등장했지만 유한계급 히어로들의 과시적 영웅 행각은 우리집 주머니 사정과는 분명 별세계였다. 각국의 소년, 남자들이 앞다퉈 서가와 스크린을 장악할 때도 그들이 내 마음을 잠시 스치긴 했지만 내가 맺은 책 속 의형제는 지금 돌아봐도 로리와 베어 선생이 유일했다. 로리와 베어 선생은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을 유희로 삼는 최초의 남성이었고 유일한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씨들이 가장 중요하고, 중요해야 마땅한 스토리에서 남성 캐릭터들 또한 좋은 캐릭터로 기능함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보기 드문 남성 캐릭터는 좋은 여성 캐릭터들에 의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로리와 베어는 아씨들 중 한 명인 조가 없었다면 등장할 수 없었다. 영화 속 조는 선대 페미니스트로서 자의식과 꿈을 겸비한 채 자신의 처지를 결혼으로 구원할 수 없음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훗날 로리와 이어지는 에이미 또한 자신의 재능을 분명히 인지한 채 이를 확장할 수 있는 세계로 진입함을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는 소설이 그랬듯 로리와 베어 선생을 로맨스의 절정을 만들어 이목이 집중되는 케이크 위 생딸기가 아닌, 풍미를 더하지만 케이크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연유와 시럽으로 기능하도록 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로리와 베어 선생이 19세기 여성이 택할 수 있는 선택지에서 상당히 진일보한 길을 걷는 여성들의 짝으로 충분히 걸맞은 상대들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정인(情人)의 능력을 존중하되 상대의 능력 발현에 성별을 문제삼지 않으며, 정인의 선택을 신뢰하되 상대의 성취를 제 것으로 취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은 아씨들>은 천편일률적인 남성 중심 영화의 문제와 그 속에서 대상화되는 여성 캐릭터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음을 잠재적으로 증거하는 범례(範例)이다. 여성을 이미지나 도구가 아닌 온전한 캐릭터로 다루는 영화는 여전히 양적으로 턱없이 부족하다. 따라서 여성 영화가 지속적으로 소구되고 제작되는 현상은 절대 유난이 아니며 남성이 점유하는 위치를 잡아먹는 일은 더욱 아니다. 이미 저울은 기울 대로 기운지라 과학실 분동을 한쪽에 전부 올려놓는대도 여전히 평형 이룩은 까마득할 것이다. 거윅의 <작은 아씨들>을 통해 우리는 좋은 여성 영화의 탄생이 외려 다양한 남성 인물의 양과 질을 담보함을 깨닫는다. 어차피 상이한 성염색체 둘이 각자의 상대역으로 등장할 거라면 한쪽이 종횡으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내포하여야 다른 쪽이 최소 구색은 맞출 수 있다. 이는 태초의 신이 자신을 본뜬 아담에서 이브를 빚은 사례부터 입증해 온 항등식이기도 하다. 영화 성비 불균형 문제 해소가 당장 어렵다면 차선책으로 이미 차고 넘치는 남성 위주 영화의 방향을 선회하여 함량 과다인 폭력과 착취뿐인 섹스를 스크린에서 일단락하는 방법도 있다. 최선책과 차선책 중 그 어느 방책에도 무리한 요구는 없다. 마르고 닳도록 재탄생되었던 고전이 오히려 지금의 영화계 문제를 타개할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은, 그간 변함없이 고여있던 영화계가 맹렬히 자성해보아야 할 지점이기도 하다.

     

    02. 거윅의 감성, 따스히 모두를 살피는 재해석.

     

      언젠가부터 리메이크작들은 아무도 부여한 적 없는 무용한 비장함에 취하여 재탄생의 본질을 도외시했다. 최근 재탄생의 과정을 거친 작품들은 대개 익숙한 공식이 주는 즐거움을 제외하곤 별다른 비평적 감흥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들의 패착이 말미암은 교훈은 다음과 같다. 하나, 원작의 힘을 지나치게 믿어 영화화가 아닌 영상화에만 치중하면 작품 전체가 태만해진다 -<레미제라블(2012)>, <래빗 홀(2010)>-. , 재탄생의 의의가 없다면 남는 건 볼썽사나운 기술력 과시 뿐이다 -<라이언킹(2019)>을 위시한 수많은 디즈니 실사화 영화들-. , 이야기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채 배경만 현시점으로 옮기면 순간 새로워보이나 이것이 신기루임은 곧바로 들통난다 -<스타 이즈 본(2018)>,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2011)>-.

      거윅 판 각색은 여러 갈래의 함정을 피한 채 여러모로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이 시나리오의 플롯은 리메이크를 위해선 텍스트에 대한 작가의 심도있는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법칙을 대견히 수행한다. 거윅은 1부와 2부의 이야기를 해부하고 뒤섞어 때론 비교로, 때론 대조로 플롯을 병치하였다. 순차성을 벗어난 시간의 축은 다소 불친절해 보여도 네 자매의 궤적에 뚜렷한 정당성을 부여하고 인물을 원작보다 생동하게 만든다. 이에 수반되는 플래시백과 플래시포워드 또한 인물 모두에게 빠짐없이 살뜰히 가닿는다. 이 귀납적인 시나리오는 존재하는 텍스트를 새롭게 교차하며 굳이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상상하여 창작하지 않고도 캐릭터의 세계와 이야기의 층위를 드넓힌다. 이 방식의 최대 효용은 작가의 분신이자 작가의 자아가 완벽히 투영된 조 이외의 자매들의 이야기를 원작보다 훨씬 또렷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소설 속 인습을 따르는 당대 보통 여성의 전형이었던 메그는, 영화를 거쳐 어떤 선택이 합리적일지 고뇌하고 책임 속에 분투하는 여성이 되었다. 허영은 여성의 본능이라며 메그를 고까워 보이도록 하던 소설 속 일부 에피소드들은, 영화 곳곳에 쪼개져 결혼 후에도 장녀의 책임 하에 살아가는 메그가 가정 안팎의 피로에 짓눌려 순간 저지른 실수일 뿐이라며 메그를 변호한다. 말수가 적고 늘 수줍으며 종래에 병사하는 소설 속 베스는, 안타까운 결말이 아니었어도 본연의 인품 탓에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가족 구성원으로 조명된다. 조와 크고 작은 갈등을 빚는 소설 속 얄미운 막내 에이미 또한 영화 속에서 후술할 배우의 압도적인 연기에 힘입어 자기 패 안에서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 카드인지 명확히 아는 인물로 그려진다.

     

      원작보다 존재감을 굳혀가며 각기 족적을 남기는 캐릭터들이 상당히 흐뭇함에도 영화가 결말로 달려갈수록 나는 원작의 결말을 알기에 어쩔 수 없이 불안했다. 돌이켜보면 올콧이 택한 원작의 결말은 소설 전체의 인상이 무색해지는 시대 타협적 결말이었다. 이에 거윅은 어느 히트곡의 제목처럼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냈다. 영화의 최후반 시퀀스는 소설의 결말이 올콧의 잘못만은 아니라며 원작자에 대한 넒은 아량을 보임과 동시에 영화가 공개되는 2020년이 요구하는 결말의 진정한 의미까지 소생해낸다. 그렇게 작가의 성실성을 곁들인 구태하지 않은 영화의 마지막 매듭은 리메이크의 정수를 달성한다.

     

     

    03. 어메이징 에이미, 아니 사실 플로렌스.

      <작은 아씨들>은 감독의 공 이외에도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완벽한 정합을 이루는 영화이다. 모든 배우들이 제 몫을 철저히 다한다. 시얼샤 로넌은 항상 눈부셨지만 배우 특유의 연기 버릇과 어미에 남아있는 아이리시 억양이 미국인을 연기할 때 특히 도드라져 전작들에선 간혹 조금씩 아쉬웠는데 이번엔 누가 봐도 조다. 배우 특유의 다부짐과 감정을 이해하는 탁월한 능력이 자신과 꼭 맞는 캐릭터를 만나 빛을 발한다. 궁시렁거리는 연기마저 전세계에서 제일 잘하는 메릴 스트립, 인물의 인품은 꽉 차게 표현하되 찰나의 미묘한 감정들도 절대 흘려보내지 않는 로라 던, 군데군데 어째 전작의 연기가 보이긴 하지만 로리가 갖는 웃자란 유치함을 제스처로 표현하는 티모시 샬라메도 충분히 미더운 연기를 선사한다.

     

      이번 <작은 아씨들>MVP는 에이미를 연기한 플로렌스 퓨이다. 주인공 조에게 훼방을 놓고 조가 놓친 것들을 종래에 획득해내는 에이미는 늘 자매들 중 독자들에게 가장 빈축을 사 온 인물이었다. 시나리오가 그 어떤 작은 아씨들의 영화화 버전보다 에이미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퓨의 시도를 치하하고 싶은 까닭은 그가 에이미의 본질을 표현해낸 데 있다. 요컨대 퓨는 왜 에이미가 자매들 중 유독 조와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는지를 연기로 설복시킨다. 이 두 자매는 닮은 구석이 너무도 많아 필연적으로 다툴 수밖에 없음을 배우의 연기가 재현한다. 퓨가 연기하는 에이미는 조와 성격이 판박이다. 어떤 장면에서 퓨는 조를 연기하는 로넌의 연기 습관을 본인 연기에 녹여내기도 한다. 덕분에 관객은 각본의 사려와 이를 200% 체화하는 배우의 직관 덕분에 조와 에이미가 동류여서 에이미는 조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음을, 그러므로 어린 에이미는 조에게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음을 이해하게 된다. 배우의 혁혁한 공은 다른 인물의 개연성마저 만들어 준다. 가령 조와의 관계가 좌절된 로리가 에이미를 택하는 이유도 퓨의 연기로 성립된다. 조의 성미를 사랑하던 로리는 필연적으로 조와 닮은 에이미도 사랑할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대부분의 독자가 소설에서 시도했을 확률이 저조했던, 심지어 원작자 올콧도 설명할 요량을 찾지 못했을 '에이미 이해하기'의 과업이 비로소 이 뛰어난 배우를 통해 영화에서 성취되고, 객체이던 인물은 영화에서 오롯이 주체가 되어 스토리의 주도권을 선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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