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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 파도를 탈 수 있다면
    영화재현상 2022. 1. 11. 09:15

    이 글은 Magazine Nerd Vol. 9 [Ok. doubt.]에 게재한 글입니다

    어디서 와 어디로 가나

      흔히 신파는 부정적 의미에서 한국 영화의 전형으로 규정되곤 한다. 신파의 기원은 한국희곡사에서 찾을 수 있다. 1900년대에 들어와 1930년대에 전성기를 맞이 ‘신파(新派劇)'은 단어 뜻 그대로 희곡 서사의 주류 흐름을 바꾸어 놓는 ‘뉴 웨이브’며 한국의 ‘누벨바그’였다. 대본의 불비와 같은 형식적 신선함과, 엽기적 사건과 연애, 권선징악 등 통속을 자처하는 내용적 흥미로움을 모두 갖춘 '신파'는, 창작 당시 반짝 융성했지만 이후 신극의 등장으로 종적을 감추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희곡사와 영화사는 시작부가 맞물려있기에 신파 코드는 자연히 영화로 넘어오게 되었고, 더는 신파가 새로운 것이 아닌 지금도 창작자나 제작자 입장에서 신파는 꽤 유효한 스토리의 방법론으로 사용된다.

     

      최근 신파는 ‘논란’이라는 단어까지 붙으며 -00논란’ 전문 사회인 한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영화를 둘러싼 여러 담론에 불을 지폈다. 논란이라니, 신파가 무얼 그리 잘못했길래 논란까지 이는 걸까. 심지어 2021년 가장 흥행한 어떤 한국 영화는 호평의 이유에 '신파가 없어 좋았다'라는 평이 다수인 걸 보면, 신파는 어쩐지 한국 상업 영화의 기본값처럼 여겨지는 듯하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자. 신파가 없어 좋은 영화라면 당초 잘 만든 영화였을 것이다. 신파가 비난받는 이유는 잘 정돈된 서사에 구태여 신파를 추가해서일까.

     

      나는 주기적으로 제기되곤 하는 한국 대중영화의 신파론에 일부 회의적이다. 가령 전형적인 리우드 영화의 지난한 가족제일주의나 국가지상주의가 한국영화의 부정적 특징으로 규정되는 신파와 얼마나 다르냐고 질문한다면 큰 차이가 없다 대답할 것이다. 신파가 문제가 된다면 30년대에 시작한 화소가 90년이 넘게 존속하는 것이 문제이지, 신파 자체는 한국영화가 영화사 100년간 누적해온 하나의 특징일 뿐이다. 

     

      이 글은 신파에 관한 의심이라 할 수 있겠다. 신파 자체가 하나의 코드라면 총체의 신파 아래 하위 항목들로 범주화가 가능할 것이다. 최근의 한국 영화들은 이 신파를 얼마나 시대에 맞게 논의하고 있을까기존의 신파 요소를 배척해야 한다면 지금 2021년에 꼭 맞는 신파는 무엇일까. 비단 한국뿐이 아닌 거시적 관점에서 ‘뉴 웨이브’는 어떤 흐름을 타고 있고 이것은 왜 지금의 관객에게 필요할까. 함께 새로운 파도를 맞아보자.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신파를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하는 관용구는 ‘눈물을 쥐어짠다’이다. 즉 영화가 관객의 감정선을 억지로 쥐어서 비틀거나 누르고, 오기 있게 떼를 쓰며 조르거나 괴롭히는 것이다. 영화가 이 지경까지 이른다면, 관객을 진소위 정서적으로 학대하는 혐의까지 입는대도 할 말 없다.

     

      이미 면역이 되어 있는 관객이라면 학대의 양상 몇 가지만 제시되어도 떠오르는 영화가 수십 편일 터다. 첫째, 눈물의 주체와 대상 간엔 시간의 한계가 존재한다. 대상의 와병이든 처형이든 주체와 대상 사이엔 예고된 이별이 있고 이들은 이것을 어떻게든 지체하는 방안으로(만) 스토리를 채운다. 둘째, 지체한 이별의 시간엔 인류 공통의 죄책감과 부채감이 -신과 시퀀스, 플롯같은- 영화의 일정 단위를 장악하다 못해 범람하여 종래엔 애조의 관념 자체가 영화의 구성이 되어버린다. 이 뒤늦은 참회와 속죄엔 헌사만이 가득하고 이별의 대상은 그 속에 극도로 대상화된다. 셋째, 그토록 소중하고 눈물 없인 떠나 보낼 수 없 대상은 끝까지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자로 남아 자신을 내보일 기회를 박탈당한다. 게다가 그들은 한없는 물리적, 사회적 약자이다. 그래서 대상에게 유, 무형의 가학행위를 했다는 후회만을 가득 전시한  관객이 눈물을 흘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심정과 상관없이 기만적이다. 비극에 처한 상대보다 슬픈 내가 더 중요하고 그 슬픔에 누군가 무리 없이 이입해주길 바라다니. 누군가의 소멸조차 기억하는 사람의 몫으로 미화하고 싶은 건 순전한 욕심에 불과하다.

     

      신파를 논할 때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신파가 단순히 서사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신파 기여 요인으로 스토리만 비난받는다면, 스토리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할 법하다. 실상 영상화의 모든 기법이 이미 고양된 감정에 신파의 불을 지피기 때문이다. 가령 희생의 비밀이 밝혀지는 플롯은 구구절절한 플래시백과 등장하며 관객의 누선을 개방한다. 여기에 관객이 울기 전부터 이미 울고 있는 배우들과 그들을 끈질기게 내팽개치는 쇼트들, 거기에 덧입어 울음을 부추기는 스트링 세션 위주의 스코어들까지 합심한다면 수습할 틈없이 찢어 발겨진 누선은 통제 불능의 지경에 이른다.

     

    한국의 새로운 파도 

     연상호 감독의 <반도(2020)>는 그가 같은 소재를 가지고 만들었던 <부산행(2016)>에 비해 대중과 평단의 반응이 모두 엇갈렸다. 그 중 <반도>가 마주한 대부분의 혹평과 거부감은 신파에 있었다. 분명 <반도>의 스코어는 과하게 감상과 정념에 기대어 있고 모두가 몸서리치는 마지막 장면은 분명 지나치게 길다. 

     

      하지만 <반도>는 신파의 여러 구습을 절묘히 변주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반도>가 마주해야 하는 신파에 대한 비판은 전술한 형식의 문제이지 서사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반도>의 특정 시퀀스와 서사에까지 신파 검출의 리트머스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서 유보적이다. <반도>와 비슷한 논조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신과 함께 - 죄와 벌(2017)-이하 신과 함께->을 생각해보자. 분명 자홍(차태현 )은 환생할 것이 빤한데 지옥문이 일곱 개나 있다는 데서 관객의 좌절은 시작된다. 이후 난리굿 분장을 하며 낭비된 배우들에 의해 일곱 번씩이나 간곡히 강조되는 어머니(예수정 분)의 한없는 희생 뒤이어, <신과 함께>는 없으면 섭섭할 뒤늦은 자식의 참회까지 보여준다. 어떻게든 관객을 울리려 수를 쓰던 게으른 영화가 결국 소기의 목적을 불편하게 달성하는 까닭은, 자홍의 위치에 관객이 명확히 위치하며 완성된다. 달리 말하면 <반도>의 신파가 유독 눈에 언짢은 이유는 관객이 자신을 대입시킬 위치가 없기 때문이다. 민정(이정현 분)의 희생은 관객 대다수가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 -극장의 그 누가 좀비를 만나 보았겠는가-의 내리사랑이다. 이때 민정의 희생 의지엔 모처럼 구구절절한 플래시백이 없고 그의 희생은 모성을 지나치게 신성화하지 않는다. 또한 민정은 <신과 함께>의 어머니와 달리 한없는 약자가 아니다. <신과 함께>가 급기야 어머니의 목소리까지 거세한 것은 관객이 극도의 약자로 설정된 인물을 연민하지 않는 것이 외려 죄악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가학적 설정이었다. 이에 비해 민정은 약하지 않다. 민정은 아사리판 서울에서도 굳건한 전사였고 제 식솔들을 거뜬히 책임진 어엿한 가장이다. 짐작건대 민정은 631부대에서 탈출할 만큼의 강인함을 과거에도 지녔고, 현재의 대재앙 속에서 모두와 함께 투쟁하고 버틴다. 민정은 끝까지 민정의 일을 할 뿐이다. 그래서 민정의 선택이 인과적으로 납득 가능하다. <반도>의 후반 시퀀스는 분명 매끄럽게 전개되진 . 하지만 이를 개진해 나가는 방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경하다는 점에서 모난 이 전개는 외려 <반도>가 성취한 영화의 강점 중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다들 잊은 것 같아 덧붙이는데 <부산행>엔 이보다 더한 ‘알로하 오에’가 있었다.)

     

    A New Waves Flow from UNDER THE SEA

      새로운 파도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대형 프로젝트에서도 불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례가 2023년 공개 예정인 디즈니의 새로운 인어공주이다. 디즈니가 자사의 <인어공주(1989)>를 리부트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 할리 베일리를 애리얼 역에 낙점했다는 소식, 어떤 사람들에게 상당히 적의(敵意) 반응을 가져왔다. 국내 영화 온라인 커뮤니티 중 최다 회원을 보유한다 알려진 곳의 반응만 보더라도 ‘자체 블러 처리를 해야겠다’, ‘흐릿하게 잘 안 보이니 좀 낫다’, ‘제목이 없으면 <노예 12년(2013)>으로 보인다...’ 등의 명백한 인종차별 발언이 유머랍시고 댓글로 달려있다. 

     

      그 외 반응 중 놀라운 것은 대다수의 반응이 ‘나의 동심을 망치지 마라’ 것이다. 좀처럼 동의하기 어렵다. 동심이라니. 2차 성징과 의무교육을 진작 거치고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수행 중인 성인들이 동심이라니. 이를 규탄하는 사람들의 동심은 소멸한 지 오래다. 그들의 유년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전 정의 그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은 각자가 어린아이일 때 유효한 것이다.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소멸한 동심을 하작일 것이 아니라 동심을 가꾸어 갈 다음 세대를 지키는 것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1989년의 애리얼은 지금과 같은 논의가 적었던-없진 않았다- 시절에 탄생했다. 그래서 대다수가 보고 듣고 익숙한 ‘Look at this stuff, Isn't it neat?’의 애리얼은 관습적으로 아름답고 응당 희다. 하지만 2020년대의 애리얼은 다르다. 2020년대의 어린이는 2020년대 버전의 동심을 누릴 권리가 있고, 그 동심들은 다양성의 보장을 넘어 다양성이 문제시되지 않는 세상의 영혼들이다. 20세기 동심 속 애리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세상이 그렇게 변했고 시대가 그렇게 발맞추어 나갔으니까.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울어도 지나간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은 캣니스 에버딘과 캡틴 마블이 존재하고, 블랙 팬서가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시대이니까. 확신컨대 저들을 만난 지금의 어린이들은, 코카소이드가 동화속 인종의 절댓값이었고 동화 속 캐릭터들의 피부색과 외양이 선악미추의 준거였다는 기존의 문화를 망측히 여길 것이다.

     

      뭇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영화 자체만 놓고’ 이야기해보아도 할리 베일리의 캐스팅은 서사 내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 먼저 인종의 변형은 스토리의 층위 변화를 유발하지 않는다. 애리얼은 역사 속 실존 인물도 아니기에 인종에서 자유로우며 안데르센의 원작이나 1989년 <인어공주>속 애리얼의 인종 서사에 긴요하지도 않다. 반농조로 하는 소리지만 차라리 어종이 바뀐다면, 원래 도다리였던 애리얼이 고등어로 바뀌는 것이 서사 변화에 훨씬 직접적일 터다. 인종 걱정의 향방은 여전히 백인 배우 해리 스타일스가 맡는 에릭 왕자 쪽으로 조타하는 이 차라리 적절하다. 여러 전적을 미루어보아 또 한 번 감읍할 만한 백인의 친절이 말미암는 흑인 구원 서사로 비추어지지 않 우려하는 편이 확률로 셈해봐도 숫제 합리적이다.

     

       지금의 한국은 신파를 새로운 흐름으로 논의하고 있고 세계는 전지구적 새로운 파도를 영화에 반영하려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새로운 논의가 담론이 되고 후에 관습으로 굳어지는 과정은 언제나 불편함을 수반한다. 파도에 몸을 맡긴 채 글을 쓰던 내가 다다른 생각의 끝은, 그 옛날의 신파가 그랬듯 지금의 흐름들도 더이상 '새로운 파도'가 되지 않는 시대가 오리라는 것이다. 자성에서 비롯한 흐름에 대한 목소리 높임은 다행히 편견과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 방향으로 진일보하여 흐른다. 그러니 연어도 아니면서 흐르는 물결을 애써 거스를 필요가 없다. 조금은 낯설더라도 새로운 파도에 몸을 싣고 이 흐름에 내 몸을 맞추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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