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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크 밀스의 '주목할 만한 시선' - 소멸하지 않는 여성, 성장하는 남성.
    영화재현상 2022. 1. 10. 15:23

    이 글은 Magazine Nerd Vol. 9 [Ok. doubt.]에 게재한 글입니다.

      미씽: 사라진 여자

     서사 양식의 일종인 '성장 서사'는 드라마를 만드는 데 요긴하여 그 적용 범위가 가용하다. 고전 속 영웅의 일대기부터 현대의 서바이벌 오디션의 참가자까지 성장 서사는 시기와 양상만 다를 뿐 그 화소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물의 성장을 도모하지 않는 서사는 소구력이 떨어진다. 성장의 반대급부에 놓인 말을 생각할 때 이는 분명해진다. 퇴화 서사, 도태 서사, 노화 서사. 어떤 조합의 합성어도 어색하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도 열거한 서사들은 내가 볼 영화 선택지에 없었으면 한다. 그래서 서사 속 안타고니스트거나 아예 냉소로 그들을 관조하는 영화가 아닌 이상 우리는 우리가 맞이하고픈 결말만큼 영화 속 인물의 성공을 염원한다. 우리는 자기 삶의 공동(空洞)을 예술이 대신 충족해 주어삶의 일부가 어떻게든 고양되길 바라고, 단 1mm라도 다른 각도의 삶을 예술이 제시해주길 희구하며 예술을 향유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사를 위해 성장이 동반되기보다, 성장을 위한 염원이 서사를 잉태하는지도 모른다. 예술은 그렇게, 의외로 삶과 지근거리에 육박해있다.

     

      인간과 영화예술 사이의 거리에 비해 여성 캐릭터들은 인간의 삶과 다소간 요원하게 그려진다. 영화 속 성장을 도모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비판받는 지점은 그들의 성장에 여성들이 도구적으로 대상화된다는 점이다. 남성의 성장에 여성은 마치 소년이 남자가 되기 위한 허들이나 정복담의 일원으로만 그려지고, 그렇게 성장을 보조한 여성들은 종래에 휘발된다. 이 문제는 남성 인물의 성 정체성과도, 영화의 관람가나 캐릭터의 비중과도 무관하다. 여성을 그저 소비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려)는 남성들이 현실에 만연하대도 영화가 그것까지 리얼리티로 구현할 필요는 없다. 남성의 성장에 여성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구현한 영화들은 없을까.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마이크 밀스의 영화들이 제시한다. 마이크 밀스는 자신의 모든 장편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이 중 <비기너스(2011)>와 <20세기 여인들(2016)[1]>에는 자신의 자전을 영화에 속속들이 배치하였다. 실제 밀스의 삶과 무관할 수 없는 캐릭터들로 채워진 그의 영화들은 ‘다큐멘터리스럽다’같은 평을 받기도 하지만 사실 이 영화들은 엄연한 픽션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자신의 삶을 영화에 녹여낸 만큼 그의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정성들여 묘사되어 살아 숨쉰다. 밀스의 영화 속 어머니와 연인은 나의 어머니와 여자친구들, 내가 교제 상대로 만났던 여자친구들과 어쩌면 만날 훗날의 아내 그리고 딸을 생각하게 할 만큼 모두 생동하고 그 자체로 ‘캐릭터’이다. 늘 모자란 남성의 성장을 위해 소비되다 끝내 증발하고 마는 여성들을 전형화한 숱한 남성 성장 서사를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들을 담은 시나리오에서 좋은 여성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그 여성 캐릭터들의 ‘영향 아래 있는 남자’들은 자신의 생태계 속 여성들을 존중하며 성장해나간다. 

    소년 시절의 어머니

    ㅇㅇ
    아네트 베닝은 &lt;20세기 여인들&gt;에서 한 가지 표정만으로 예닐곱 가지의 감정을 동시에 드러내는 신공을 발휘한다. 그러다 그 감정들 중 하나를 순간 돌발하기도 하는데, 그마저도 캐릭터가 처한 상황으로 십분 납득시키는 차원이 다른 연기를 선보인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가 중년 여성이 겪는 중년의 위기(mid-life crisis)를 서사 층위에서 다루는 방식은 대개 뒤늦은 육욕의 희열이나 선각자를 만나는 여행 등 피상적 치유로 돌파되곤 하였다. 그것들은 일시적 도피, 일탈에 그칠 뿐 현실의 중년 여성이 겪을 산재한 문제들을 해결하진 못한다. 물론 그 자체도 고루한 여성상을 전복하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지만, 대다수 영화는 이를 흥미 차원으로만 비겨 없애며 소재 활용의 책임을 방기한다. 

     

      밀스의 영화 속 어머니들 역시 중년의 위기에 처해있지만, 영화는 이를 해결하려 수를 쓰지도, 자극의 미봉책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의 세계 속 어머니들은 자기 앞의 생이 욕구의 정량을 충족해주지 못하는 욕구 불만에 처해 있다. 하지만 영화 속 어머니들은 자신이 처한 문제를 대사로 항변하지 않는다.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못 하는 것이라 표현하는 편이 적절할 터다. <20세기 여인들>에서 언급되듯 미국 대공황 세대들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은 해 본 적이 없고, 이를 시도할 가능성 자체를 닫고 살며 타인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 또한 질색하는 사람들이니까. 매슬로가 그랬던가, 인간은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욕구로 진입이 가능하다고. 매슬로의 입장에서 밀스의 영화 속 그녀들은 어차피 이전 단계 욕구에서 결핍 20%는 삶이 채우지 못하니, 그럴 바에야 자신의 또 다른 욕망의 산물인 아들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120%이길 앙망하는 사람들이다. 

     

        <20세기 여인들> 속 셰어하우스를 운영하는 도로티아(아네트 베닝 )는 식솔 총량의 법칙을 수행하듯 영화에서 수차례 파티를 연다. 그는 사람들에게 늘 밥이나 먹고 가라며 항상 자기 집에 초대해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듣는다. 이 파티엔 방금 불이 난 자신의 차의 사고 경위를 물으러 온 소방관도, 시험 삼아 놀러 가 본 클럽의 파트타임 직원도 모두 참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바운더리 안에는 항상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먼 )가 있다. 머릿수에 비례해 다양한 군상이 있는 식탁에서 제이미는 어머니의 주최로 또 다른 세상을 배우고 경험한다. <비기너스> 속 조지아(메리 페이지 켈러 )는 게이인 남편 할(크리스토 퍼 플러머 )과 평생을 살았다. 할의 성 정체성을 간파하면서도 조지아는 삶의 반려인으로 할을 택했고, 가정의 동반 경영인으로서 그를 신뢰했다. 하지만 출근길에 나누는 키스 등 할에게 보내는 시그널은 항상 미적지근한 응답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마다 조지아는 이를 지켜보는 아들 올리버와 독특한 시간을 보낸다. 올리버에게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방금 네가 본 일은 없던 일인 셈 치자는 무언의 합의로 시체놀이를 제안하거나 아직 어린 올리버에게 한 블록 정도의 운전을 시킨다. 그러다 조지아는 올리버를 데리고 할의 일터인 미술관에 가 아들이 보는 앞에서 기묘한 행위예술을 하거나 관람객들에게 괜히 말을 붙이며 자신의 욕구들을 표출하곤 한다. <썸서커(2005)> 속 오드리(틸다 스윈튼 )는 완고한 남편과 구강기적 행위에 천착한 아들 저스틴(루 테일러 푸치 ) 사이에서 열심히 살아간다. 그녀가 열심인 분야 중 하나는 '덕질'이다. 오드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셀러브리티 맷 슈람(벤자민 브랫 )과의 데이트 티켓 당첨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맷 슈람과의 데이트를 위해 새 옷을 사러 가는 자리에 일부러 저스틴을 데려가며, 이건 재미이고 나도 내 삶에서 특별한 걸 찾을 권리가 있다며 똑똑히 일러둔다. 밀스의 영화 속 어머니들이 보이는 욕구 불만은 인물을 전시하거나 자극을 유발하는 기제가 아닌, 그 자체가 인물을 규정하는 하나의 개성이다. 그들은 불만한 욕구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제 몫의 삶을 살아간다. 세 어머니들은 자신이 품은 비애를 아들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자신의 불만족한 상태를 애써 감추지도 않는다. 

     

    &lt;비기너스&gt;의 메리 페이지 켈러는 어워즈 시즌에 크리스토퍼 플러머만큼의 주목을 못 받아 뒤늦게 속상하다. 아주 좋은 '조연 연기'였다. UPI코리아 제공.

     

       그렇다고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여 아들을 옥죄는 어머니가 아니다. 그들은 아들이 완벽한 타인이자 영원한 이성(異性)임을 이성(理性)적으로 식별한다. 그래서 이들이 아들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볼 때나 아들을 자신의 품에서 독립시키고 그리워할 때 내비친 감정은, 내가 모르던 연인의 모습에 약간의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연애의 감정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도로티아는 클럽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 제이미의 성취담을 들은 후 애비(그레타 거윅 )에게 이야기한다. “바깥세상의 한 사람으로서 넌 그 아일 본 거야. 아마 나는 평생 보지 못할.” 자신이 늙어보이는 게 싫다며 저스틴에게 엄마 대신 이름으로 불러달라 요청하는 오드리는, 집을 떠나 뉴욕으로 진학하게 된 저스틴을 향해 처음으로 아쉬움을 표한다. 이때 오드리는 연인 간 이별 멘트로도 손색없는 대사를 뱉는다. “뉴욕에 있는 너의 그림이 그려지질 않아. 네가 그냥 사라지는 거면 차라리 나은데 뉴욕은 네가 안 보인단 말야.” 보이지 않는 아들의 모습을 궁금해하지만  여성들은 아들도 자신도 독립된 개체로 세계 속에 공존하여 병진하길 바란다. 그렇게 영원한 타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미완의 과제로 남겨두고 아들을 보낸다. 아들들 또한 어머니를 온전히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제이미도 올리버도 저스틴도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존중할 뿐이다. (제이미는 어머니와의 결정적 하루를 보내고 어머니와 영원한 친구가 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식의 교감은 그날로 끝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아들들은 이내 어머니들을 통해 불현듯 깨닫는다.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순 없지만 삶의 모든 날 모든 순간을 일일이 공유하지 않아도 소중한 이와 동시에 통한 찰나의 전류가 타인에 대한 생 전체의 기억을 달리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억은 한 번으로 충분하여 이를 다시 겪지 못한대도 경험자 둘 사이엔 깨뜨릴 수 없는 신뢰가 생긴다는 것을.    

     

    틸다 스윈튼의 변신이 치하받아야 하는 부분은 분장의 힘으로 외양을 바꾸는 데 배우 본인이 거리낌이 없는 것 이상으로, 어떤 배역에선 배우 본인의 카리스마를 죽이다 못해 아예 0으로 만들어 버리는 '연기력'에 있다. 스윈튼과 같이 타고난 오라가 충만한 이들에겐 무얼 더하는 것보다 덜하는 것이 훨씬 어려울 터고, 그거야 말로 '변신'일 터다. &lt;썸서커&gt;는 이에 들어맞는 좋은 예들 중 하나이다. 소니 픽쳐스 릴리징 코리아 제공.

     

        밀스의 세계에서 어머니들이 갖는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이 가정형편에 충분히 일조하는 직업인이면서 집과 가정 모두를 가꾸는 진정한 ‘가장(家長)’이라는 점이다. 도로티아, 조지아, 오드리에겐 각각 비행기 제도가,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리고 간호사라는 직업이 있다. 이들의 직무특성과 직업활동은 각 캐릭터의 성격을 충분히 설명한다. 조지아의 직업은 자기 집을 지키며 동시에 누군가의 터전을 수리하는 사람이고, 도로티아는 러닝타임 내내 수리 중인 집에 하숙을 놓고 파티를 열며, 집을 들고 나는 사람들과 함께 아들을 공동 양육한다. 집을 수리하는 것은 곧 삶의 근원을 재정비하는 것이다. 들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끊임없이 미화하고 채비하며 살아간다. 오드리는 영화 중반 새로 일할 병원을 찾아 나선다. 그녀의 구직 면접 아들 저스틴이 자신의 정체감을 찾아가는 과정과 교차 편집되어 묘사되는데, 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아들만큼이나 앞으로 나아가는 어머니의 서사가 저스틴을 이루는 데 긴요함이 플롯으로 보강되는 셈이다. 가장의 위치에 선 이들은 자연히 기성세대의 한계를 보이며 다른 세대와 의견 충돌을 빚기도 한다. 남성을 양육하는데 남성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믿는 도로티아는 애비와 줄리(엘 패닝 분)에게 제이미의 성장을 일임하면서도 애비가 설파하는 페미니즘이 극단적이라며 우려한다. 조지아는 할을 인생의 동반자로 맞기로 결심하며 할에게 동성애는 고칠 수 있으니 함께 고쳐가자며 설득한다. 이들이 보이는 반응들은 어머니들을 성차별주의자로 그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20세기 사람에 관한 시대 탐구의 일환이고, 그저 한 시대의 상징이 마침 어머니일 뿐이다. 한 시대의 일면을 대표하고 한 가정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심지어 국어사전을 열어 가장(家長)을 찾으면 '남편'을 달리 이르는 말이라 뜻풀이가 되어 있다-이 주로 '아버지'였던 미국 영화에서, 이는 십분 흥미로운 지점이다. 그리고 이들이 보이는 시대의 한계 넘어야 할 세대 갈등의 벽도 아니고그들이 결말에 이르러 자신의 생각을 바꾸며 갈등이 봉합되지도 않는다. 부러 관습에 기대지 않은 채, 그냥 그저 그런 특성들마저도 인물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자리할 뿐이다.

     

    그 여자 그 남자

     마이크 밀스의 영화 속에서 어머니만큼 정성스레 다뤄지는 여성들은 남성 주인공들의 연인들, 혹은 연모의 대상들이다. 그가 그린 여자친구들은 으레 어머니와 동치 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주지했듯 밀스의 세계 속 어머니들이 확실한 개성을 보유한 까닭에, 이 여자친구들은 세간의 몰염치한 남자들이 이야기하는 '엄마같은 여자'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들은 기존의 남성 성장물처럼 어떤 깨달음 준 채 홀연히 증발하지 않는다.

     

        <비기너스>에서 멜라니 로랑이 연기한 안나는 주인공의 연인들 중 가장 비중이 높다. 아버지 할의 죽음 이후 상실의 늪에서 허덕이는 올리버(유안 맥그리거 분)의 삶에 등장 안나는, 정성들여 묘사된 조지아와 할 심지어 주인공 올리버까지 떠올리게 하며 존재감을 굳힌다조지아와 안나는 인물형이 닮아 '엄마같은 여자'이다. 조지아가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는 쇼트는 대놓고 창밖을 바라보는 안나의 쇼트로 교차며, 안나와 조지아는 모두 유태계이다. - 허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올리버가 안나에게 이끌리는 이유가 조지아와 여러 면모와 같아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안나와 올리버 또한 성정이 닮았다. 안나는 가족으로부터 받은 상처에 기인해 한 곳에 정주하지 못해 호텔을 전전하고, 올리버는 부모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유년 내내 바라본 후 남녀의 결합에 일말의 회의를 지닌다. 안나와 올리버는 모두 죽음에 매료되어 있고, LA의 집을 올리버로부터 소개받은 안나는 이후 올리버에게 똑같은 과정으로 뉴욕 집을 소개하며 관계 발전의 가능성을 동시에 보인다. 한편 할과 안나는 플롯으로 대칭한다. 할과 올리버 부자의 이별담은 안나와 올리버 커플의 연애담과 내내 대구를 이룬다. 한쪽은 저물고 한쪽은 발아하는 두 플롯의 연속은 안나와의 일시적 이별이 할의 죽음과 맞붙으며 언뜻 동시에 조락을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안나와 올리버가 재결합에 성공함에 따라 연애담은 소생하여 안나와 올리버가 함께 ‘비기너’로 나아가게 한다.  그리고 올리버가 무엇을 '다시 시작함'은, 당연히 할이 생전 바랐던 것이다. 

    <비기너스>의 안나(멜라니 로랑 분). UPI코리아 제공.

       마이크 밀스는 어느 인터뷰에서 <20세기 여인들>의 줄리는 구체적 모델이 있기보다 자신이 만났던 여자친구들의 혼합(amalgamation)이라 언급한 바 있다.[2] 줄리는 남자들이 모르는 여성의 세계에 대해, 그리고 남성들이 스스로 세우는 남성상이 얼마나 허상에 불과한지 제이미에게 끊임없이 알려주려 한다. 제이미가 세상을 달리 보게 되는 계기 중 하나는 줄리를 위한 임신 테스트기를 직접 구매하면서부터이다. 또한 애비의 권유에 의한 페미니즘 도서의 탐독 후 궁극적으로 여성에게 만족을 '주는' 남자가 되고자 하는 제이미에게 여성의 오르가슴과 남자의 담배가 지니는 허위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도 줄리이다. 도로티아가 유일하게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고백하는 순간도 도로티아의 욕구불만을 진작 간파하고 있는 줄리 앞에서이다.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껄끄러운 도로티아의 전언을 제이미에게 전해주는 것 그래서 줄리의 몫이다. 이는 줄리의 입을 빌린 도로티아의 아들을 향한 자기 고백임과 동시에 여자친구 어머니가 동치되는 밀스의 세계에서 아들은 영원한 이성임을 재확인하게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줄리는, 영화의 마지막에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훌쩍 도약한다.

     

    <20세기 여인들>의 줄리(엘르 패닝 분).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썸서커>의 레베카(켈리 가너 분)는 대상화의 지적을 피해가긴 어렵다. 하지만 이를 변호할 구석은 있다. 만지고 싶고, 보고 싶은 심리는 엄연한 사랑의 감정이다. 영화는 저스틴의 요동하는 정욕들을  감정으로써 충분히 묘사하되 이를 시선으로 지 않는다. 따라서 둘의 첫 섹스신이 찍힌 앵글 레베카의 노출은 없고, 그밖의 다른 신체 부위들은 관객의 시선에 궁금하게 찍히지 않았다. 레베카는 저스틴을 놀잇감처럼 부리다 나고 레베카에 대한 불미스런 소문은 또래들 사이에 남는다. 하지만 저스틴은 -<건축학개론(2012)>의 승민과 달리- 그런 레베카를 XX 취급하지 않는다. 저스틴은 소문이 어떻든 대상화된 가십들이  주체를 구성하는 전부가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썸서커>의 레베카(켈리 가너 분). 소니 픽쳐스 릴리징 코리아 제공.

     


     

     

    [1] 2017년 한국 개봉 당시 번역 제목은 <우리의 20세기>였지만, 원제 <20th Century Women>의 의도와 제목이 품는 함의 모두를 가리는 제목이라 판단하여, 새로 번역하였다.

    [2] Matt Hoey, 「Punk, Politics and Parenting」, Writers Guild of America 인터뷰 기사, 2016.12.30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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