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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도(2020, 연상호)>
    영화재현상 2022. 1. 10. 16:26

    E(연상호)의 충족.

      어차피 내가 <반도>에 품은 기대는 스릴과 액션이 아니었다. <부산행>에서 익히 보았던 '밀실동거형 스릴'일망타진 액션은 초반 홍콩행 선박 시퀀스가 전부이고, <반도>는 오프닝 크레딧 이후 <부산행>과 거시적 세계관만 공유할 뿐 액션과 스토리, 비주얼의 궤를 달리할 것임을 항변한다. 다행이라 여겼다. <반도><부산행>의 출애굽이 같은 방식이었다면 내 기댓값을 충족하지 못했을 터다. 내가 <반도>에 품은 기대는 연상호가 읽어내는 한국의 동시대성이었으니까. 감독의 이전작 <부산행>이 만족스러웠던 이유는 <부산행>이 좀비물의 외피를 쓰고 당시 한국 사회의 무력한 징후를 정확히 읽어냈기 때문이다. <부산행>과 잇달아 개봉했던 김성훈 감독의 <터널>, 2019년 이상근 감독의 <엑시트>까지 2016년 이후의 한국 재난물들은 한국 사회의 재난 대응 양상을 정밀히 포착하며 2014년 이후 모든 국민의 마음에 응어리진 죄책감을 어루만진다. 쇼트와 대사가 읽히는 맥락이 감독의 의도와 설령 무관하대도 우린 이미 눈 앞의 재난과 사고를 2014년과 같은 크기로 바라볼 수 없다.

     

      <반도>가 이스터에그마냥 영화 곳곳에 숨겨 놓은 한국 사회의 맥락은 노골적으로 동시대적이다. 처음엔 탈출하고자 했으나 종래엔 모두가 차지하려 안달인 트럭은 국민 대다수가 부정적인 상을 품지만 입사(入社)와 제품 구매는 마다하지 않을 한 대기업의 것이다. 밤의 한국 좀비를 자극하는 것은 불야성의 한국 유흥 문화이다. 난장이 된 서울 중에서도 영화가 설정한 격전지는 사교육 과열과 주상복합, 야구장과 서울방송 등 한국이 품는 거의 모든 욕망이 한데 뒤엉킨 지역이다. <반도>가 품으려 하는 이야기의 범위는 한국만 국한하지 않는다. 국가의 지위를 잃고 반도'라 통칭되는 대한민국은 트럼프 시대의 난민 이슈를, 마음껏 질주하되 매력의 본질을 대상화에 두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은 세계 각국 여성 이슈의 당위적 변화들을 떠오르게 한다.

     

      <반도>의 동시대성은 개봉 시점인 코로나 시국과도 운좋게 맞물려 양가감정을 자아낸다. 좀비물은 으레 좀비를 바이러스와 동치로 설정하지만 우연이 이렇게까지 일치하는 것은 기실 영화의 복이다. 가령 좀비들의 본격적 기지개를 알리는 준이(이레 )"해 뜨네"열 나네"로 바꾸어본다면, 보초병의 "몇 마리나 된다고 (좀비를) 보고해"를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됨에 따라 점점 방역에 불감해지는 이들의 n차 감염 실례로 대치해본다면, 극장 밖 현실이 영화 내부를 송연히 넘나든다. 일상의 대부분이 송두리째 바뀌어 바이러스와 공존한 채 사투 중인 지금의 우리들과, 좀비 떼가 창궐하는 <반도> 속 서울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수많은 인간 군상들은 과연 다를까 다소 혼란해지기도 한다.

    코로나 시국과 <반도> 속 좀비 디스토피아를 더없이 유사하게 만드는 데는 <반도>가 좀비를 사용하는 방식도 한몫을 한다. <반도> 속 좀비는 인간에게 치명상을 입히긴 하지만, 외려 서로 죽이지 못 해 안달이 난 건 좀비가 아닌 인간들이다. <반도> 속 인물들은 각자 '자체 방역'을 한 채 좀비와 맞서거나 공존하고 심지어 좀비를 유희의 일부로 삼기까지 하며 낮밤을 지새운다. 지금 지구를 드리우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또 어떤가. 백신 개발의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어느 순간 우리는 바이러스와 공생하는 삶을 일상의 일부로 내면화했다. 마스크 착용과 체온 측정, 사회적 거리두기와 손씻기로 모두가 무형의 바이러스를 향해 단결하지만 결국 이 시국에도 인간 간 차별과 혐오는 국경을 넘어 만연하다. 물론 현실의 공포는 늘 이야기 밖에 있다. 사람들이 마스크도 안 쓰고 선박 대합실 안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장면이나, 저들 가운데 확진자가 나온대도 크게 놀랄 것 같지 않은 '머릿수'로 승부하는 좀비 떼들은 그럴 필요가 하등 없음에도 영화관 밖 현실의 공포를 자꾸만 생각하게 한다.

    반도의 신파에 관한 변

    <반도>에는 분명 미상불 석연찮은 구석들이 있다. 우선 나도 모르는 새 홍콩을 촬영하는 방식을 동서를 막론하고 모두가 왕가위 필터로 찍기로 합의했나 보다. 또 홍콩에서 한국으로 잠입한 이후의 주인공 정석(강동원 )의 쓰임은 큰 효용이 없고 심지어 악역을 전담하는 인물들보다 서사에 기능하는 바가 약하다. 정석이 수행하는 제임스 본드식의 액션은 강동원이라는 훌륭한 재료의 물성을 돋보이게 하지만 사실 <반도>의 스토리에선 이질적이다. 그리고 정석이 가질 수밖에 없는 트라우마는 정석의 이후 행보에 결정적이지만 인물의 전사를 구성하는 방법만 놓고 보자면 지나치게 손쉽다. 카 체이싱 시퀀스는 익숙한 도로를 새롭게 질주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질주의 주체에 여성 캐릭터가 서있다는 점에서 분명 쾌감을 주지만 다소 긴 감이 없지 않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둔감한 관객도 알아챌 만큼 좀비 사용이 눈에 띄게 선택적이다. 조금 더 수비 범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캐릭터 쓰임도 이해는 가지만 어쩐지 아쉽다. 하지만 이 아쉬움은 <반도>의 독자성과 무관하다. 조역이지만 꽤 입체적인 캐릭터인 김 이병(김규백 )이 정석 일당과 함께 탈출했으면 어떨까 싶지만 그건 <셰이프 오브 워터>가 될 테고, 민정(이정현)과 두 딸들이 정석과 함께 다시 631부대로부터 서울을 수복하는 결말이었다면 어떨까 싶지만 그건 <매드맥스>가 될 테니 말이다.

     

     

      <반도>가 마주한 대부분의 혹평과 거부감은 신파성에 있다. 분명 <반도>의 스코어는 과하게 감상과 정념에 기대어 있고 모두가 몸서리치는 마지막 장면은 분명 지나치게 길다. 제인 소령을 향한 준이의 대사는 듣는 순간 아주 잠깐 그럴거면 반도로 돌아가던가'하는 생각이 울대까지 차올랐다. 이처럼 <반도>가 마주해야 하는 신파에 대한 지적은 형식의 문제로 사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도>의 특정 시퀀스와 서사에까지 신파 검출의 리트머스지를 들이대는 것에 대해서 적어도 나는 유보적이다. 최근 개봉작 중 비슷한 논조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신과 함께 - 죄와 벌(이하 신과 함께)>을 생각해보자. 분명 자홍(차태현 )은 환생할게 빤한데 지옥문이 일곱 개나 있다는 데서 관객의 좌절은 시작된다. 이후 난리굿 분장을 하며 낭비된 배우들에 의해 일곱 번씩이나 간곡히 강조되는 어머니(예수정 )의 한없는 희생과 모성의 지나친 신성화에 뒤이어, <신과 함께>는 없으면 섭섭할 뒤늦은 자식의 참회까지 보여준다. 어떻게든 관객을 울리려 수를 쓰던 게으른 영화가 결국 소기의 목적을 불편하게 달성하는 까닭은, 자홍의 위치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국 영화의 신파는 뒤늦은 자식의 참회에 관객이 위치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성립한다. 달리 말하면 <반도>의 신파가 유독 눈에 언짢은 이유는 관객이 자신을 대입시킬 위치가 없기 때문이다. 민정(이정현 )의 희생은 대다수의 관객이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 -극장의 그 누가 좀비를 만나 보았겠는가-의 내리사랑이다. 이는 분명 튀는 그림이지만 그렇다고 염증을 낼 만한 신파는 아니다. 민정의 희생 의지엔 모처럼 구구절절한 플래시백이 없고 그의 희생은 모성을 지나치게 신성화하지 않는다. 민정은 민정의 일을 할 뿐이다. 상황이 지나치게 민정을 몰아가는 감은 없지 않지만 민정의 선택이 인과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또한 민정은 <신과 함께>의 어머니와 달리 한없는 약자가 아니다. <신과 함께>가 급기야 어머니의 목소리까지 거세한 것은 관객이 극도의 약자로 설정된 인물에 연민하지 않는 것을 외려 죄악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가학적 세팅이었다. 이에 비해 민정은 약하지 않다. 짐작건대 민정은 631부대에서 탈출할 만큼의 강인함을 과거에도 지녔고, 현재의 대재앙 속에서 모두와 함께 투쟁하고 버틴다. <반도>의 후반 시퀀스는 분명 매끄럽게 전개되진 않다. 하지만 이를 개진해 나가는 방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경하다는 점에서, 신파의 사전적 정의 그대로 새로운 파도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모난 이 전개는 외려 <반도>가 성취한 영화의 강점 중 하나로 보인다. 그리고 다들 잊은 것 같아 덧붙이는데 <부산행>엔 이보다 더한 알로하 오에가 있었다.

     

    #_설마했던_충무로의_이정현_사용법 #바꿔 #줄래

      <반도>의 배우 사용 방식은 절반은 뛰어나고 절반은 아쉽다. 구교환이 <반도>의 세계를 누비고 휘젓는 맵시는 소주 광고 브로마이드에 얼굴을 댄 옆모습의 등장부터 완벽하다. 어느 순간 독립영화의 유니콘과 같은 존재가 된 그가 상업 영화에 녹아들 수 있을까 했던 일말의 의심은 내가 몇 해 전 김소진이 상업 영화에 얼마큼 녹아들까 우려했던 것만큼 공연한 우려였다. 김민재와 구교환이 방 안에서 에너지만으로 맞붙는 장면은 대개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에서 주로 맞닥뜨리게 되는 연기의 황홀경같은 데가 있었다. 어쩐지 클수록 배우 신동미를 닮은 이레는, <소원><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에 이어 아양과 재롱 없이도 있는 그대로의 청소년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캐릭터를 매번 미덥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반도>는 배우 김규백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외우게 된 영화기도 하다.

     

      이정현이 보여주는 안정감과 별개로 이정현의 쓰임에 대해선 분명 논의할 필요가 있다. 몇 년 전 영국의 명배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어느 순간 감독들은 자신을 작은 배역이되 작품의 특정 순간을 휘어잡는 연기 정도로만 자신이 기능하길 원한다고. 이 명배우의 항변은 2010년대 이후 배우 이정현을 바라보는 감독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구절이기도 하다. 이정현은 배우일 때나 가수일 때나 분명 폭발력이 강점인 엔터테이너다. 무수한 감독들은 <명량>의 정씨 여인이나 <파란만장>의 만신, 거슬러 올라가자면 데뷔작 <꽃잎>의 소녀에서부터 그를 짧은 순간 임팩트를 불러오는 적격의 키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또한 이정현을 주연으로 앞세워 그가 지닌 폭발력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게 무리가 아님을 입증한 작품이었다. <반도>의 결정적 장면에서도 이정현은 맞갖게 연기해냈다. 하지만 이정현은 신 스틸의 차원을 제거해도 효용이 있는 배우이다. <범죄소년>에서 이정현이 보여준 담백한 울림을 기억하는 관객이 나만은 아닐 것이라 거의 확신한다. 한 장면을 온전히 내어 장악하는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서사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배우인데, 익히 증명된 쓰임으로만 배우가 활용되는 게 못내 아쉽다. 앞으로 이정현을 기용할 창작자가 발휘해야 할 창의성은 이정현의 퍼포먼스를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미처 못 본 이정현을 보여주는 것일 터다.

     

    追伸 나를 위한 좀비랜드는 없다.

    <반도>를 보며 나는 좀비 디스토피아에선 어떤 방식으로든 생존할 수 없을 거란 의구심이 도졌다.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길치라 민정처럼 비상구로 가는 길을 단번에 기억해내지 못해 좀비 떼에 1번 제물로 봉헌될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내가 좀비가 된다 한들, 나는 달리기를 몹시 싫어하는 까닭에 - 지난 주 동생은 내 눈 끝 상처의 탄생 경위를 듣더니 진지하게 "오빠가 달리기도 해?"라고 물었다 - 성실성 결여를 근거로 좀비로서의 본분도 못 다 할 듯 하다. 달리기가 싫어 경보로 다니는 좀비는 아무래도 모양이 빠지고 자연히 속도에서도 뒤쳐저 좀비 커뮤니티에서 도태되지 않을까. 좀비 사회에서도 자연선택설과 적자생존론은 상통할 테니 말이다. 뭐가 됐든 나는 좀비 바이러스가 대한민국에 도래한다면 이러나저러나 생을 마감할 것이 뻔하니 나를 위해서라도 좀비가 이 땅에 당도하지 않는 것을 소원 목록에 추가해야 할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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